도서명 : 축구는 한국이다 (한국 축구 124년사, 1882-2006, 인사 갈마들 총서 3
축구는 한국이다
모든 스포츠 가운데 사람을 가장 미치게 만드는 종목은 단연 축구다. 축구는 종교요, 전쟁이다. 경건과 열광이 교차한다. 축구가 종교가 아니라면, 적어도 주술(주술)인 건 분명하다. 골을 넣은 후 기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축구장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그리고 축구는 매우 전투적인 경기다. 인간의 몸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미디어로 축구를 따라갈 만한 것이 없다. 저자 강준만은 이러한 축구가 한국 사회와 어떻게 결합해 왔는가를 124년의 역사를 통해 살피고 있다. 그리고 한마디로 말한다. “축구는 한국이다!” 한국보다 축구를 더 잘하는 나라는 있지만 축구를 매개로 한 정치사회적 의미 부여에 있어선 한국이 가장 뛰어난 나라라는 뜻이다. 집단주의적 가치와 더불어 눈코 뜰 새 없이 몰아치는 격렬한 경쟁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는 축구야말로 한국 사회를 규정짓는 특징이다.
과거 한국의 축구를 키운 2대 원동력은 일본과 북한
축구를 매개로 한 정치사회적 의미 부여에 있어 한국이 뛰어나다는 점은 한국인의 축구 사랑법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인은 축구를 사랑하지만 축구 그 자체보다는 축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와 의미를 더 사랑한다. 한국 축구가 민족주의와 결합했다든지, 한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지적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인들은 한편에서 축구를 통해 국제·국내적 갈등의 대리전쟁을 펼쳤던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일본과 북한에 대한 경쟁심, 일본과 북한만큼은 이겨야 한다는 살인적인 투쟁심은 축구 열기를 지펴온 원동력이었다.
한국적 쏠림의 문화
작은 땅에 많은 인구가 애국심으로 무장한 채 고도의 중앙집권 사회를 이루며 밀집해 살아가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바로 한국 특유의 ‘쏠림’의 문화는 여기에서 잉태된다. 여기에 한국인 특유의 ‘놀자판 문화’가 결합해 2002년 한국인들은 붉은악마가 되었다. 과거 국제 스포츠에서 한국 선수의 승리에 대중이 열광한 건 한(恨)풀이의 성격이 강했다. 그건 일종의 존재 증명이었다. 스포츠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한풀이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한국인들 특유의 ‘놀자판’이었다. ‘놀자판’은 세월이 흐를수록 그 비중이 커졌고, 그게 대폭발을 일으킨 게 바로 2002년 6월의 이른바 ‘월드컵 신드롬’이었다. 경쟁이 심한 일상의 억압, 근엄한 사회, 그리고 역사적 스트레스로부터의 탈출 무대가 마련된 셈이다.
개화기에서 일제 치하: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피시호를 통해 도입된 근대 축구는 곧 한국인들을 매료시킨다. 1905년 배재고보에 한국 최초로 어설프게나마 정식 골대가 세워지자 이 운동장에서 경기를 해보는 것이 모든 축구 선수의 소망이었고, 심지어는 이 진기한 물건을 구경하러 일부러 찾아오는 관광객까지 있었다.
해방에서 1950년대:
1948년 런던올림픽.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불과 두 달 전에 구성된 대표팀은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0:12로 패했다. 물기를 머금은 가죽공이 안길 때마다 가슴이 뚫리는 줄 알았다는 당시 대표팀의 골키퍼 홍덕영은 슛을 막아 길게 보내고 난 뒤 골문 앞으로 다시 되돌아와 몸을 돌리면 상대의 공은 벌써 페널티 에어리어에 와 있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홍덕영은 관중석으로 길게 볼을 내질렀다. 볼보이가 공을 주워오는 것이 우리 선수에게 공을 줬을 때보다 골문 근처로 공이 되돌아오는 것보다 시간이 더 길었기 때문이다. 한편 1949년 전국여자축구대회가 처음으로 열려 무학여중이 우승했는데 규칙은 거의 남자와 같았으나 가슴으로 날아오는 볼은 손으로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가난했지만 축구에 대한 열기만큼은 뜨거웠던 시대였다.
1960년대:
이 시기는 한국 축구의 최악의 침체기였다. 각종 국제대회에서 참담한 성적을 냈던 것이다. 그나마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이 위안거리였다. 이 대회가 열렸던 효창구장은 한국 최초의 축구 구장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의 경기가 있는 날, 드디어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관중 수용 능력이 1만6천 명인 효창구장에 10만 관중이 몰리는 바람에 27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선수들은 전반전이 끝난 뒤에도 라커룸에 들어가지 못하고 운동장에서 휴식을 취했다. 심지어는 모국의 대사와 우리 체육회 대표 한 사람은 변소의 들창으로 부축을 받아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1966년 런던월드컵에서 북한 축구가 8강에 오르자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충격을 받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양지 팀을 만들었다.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