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 사건사가 아닌 평범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역사 방법론, 일상사로 바라보는 새로운 한국근현대사를 만난다!
이 책은 총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포함해, 총 11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지배와 폭력, 제국주의와 식민지, 젠더와 구술사, 노동과 저항운동 등을 다루고 있다.
이상록과 이유재는 프롤로그에서 한국 진보 역사학의 흐름과 독일 일상사의 만남, 그리고 앞으로 일상사 연구의 미래를 제시한다. 알프 뤼트케는 일상사-중간보고에서 독일 일상사 연구 동향을 정리하면서 독일과 한국 일상사의 공동작업의 매력을 지적하면서 각 사회문화적 독특성과 차이를 맥락화한 일상사적 비교사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허영란은 억제된 균열에서 ‘장시(場市)’를 통해 식민지 민중의 일상을 발견하고, 경기도 안성 지역의 장시, 철도부설과 시구개정 운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민족사’의 틀로 포착되지 않는 지역주민의 복합적인 욕망과 관계망을 드러낸다. 소현숙은 ‘근대’에의 열망과 일상생활의 식민화에서 식민지 조선의 부르주아민족주의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생활개선운동이 어떻게 총독부의 관제운동으로 흡수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젠더역할의 정치학을 드러낸다.
미하엘 빌트는 폭력에 대한 단상에서 이제까지의 폭력에 대한 연구들이 폭력의 결과에 집착했다고 비판하며 폭력 자체가 지니는 의미를 분석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빌트는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여러 담론들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폭력의 미학 뒤에 가려진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폭력의 작동방식을 파헤치는 방법론을 모색한다. 빌트의 논문이 폭력에 대한 추상적 고찰의 글이라면, 장용경의 논문은 일상 속에서 펼쳐진 폭력을 구체적으로 다룬 글이다. 장용경은 私刑과 식민주의에서 조선인 아동이 일본인 과수원이나 마당에서 과일을 따거나 일본인 상점에서 과일을 훔치다 걸려서 일본인이 조선인 아동을 잡아 묶고 린치를 가한 사건들에 대한 자료들을 분석하였다.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형이 근대적 소유관념에 입각한 특정 규범을 조선인들에게 강제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도로테 비얼링은 젠더 역사와 구술사에서 젠더사가 부각되게 된 서유럽 여성사의 맥락을 소개하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목소리를 역사화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구술사가 갖는 의미와 방법론적 문제들을 지적한다. 구술자 기억이나 회상이 갖는 신빙성에 대한 불신의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구술자의 진실성을 최대한 이끌어내야 하며 집단기억의 흔적과 완고함을 구술의 텍스트 속에서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임하는 ‘광기에 찬’ 여성들에서 축첩을 둘러싼 전근대적 가족질서의 해체와 그 과정에서 발생하던 여성의 지위문제를 간통죄 재판에 대한 여성들의 태도분석을 통해 시도한다. 1954년 현순원이라는 여성이 남성을 간통죄로 고소하면서 벌어진 간통쌍벌죄 고소사건에 대한 여성들의 격렬한 반응을 당시 남성사회는 ‘광기’로 묘사했고, 페미니스트 여성은 “사회에 대한 여성들의 항의”라고 평가했다. 이 사건에 대해 이임하는 1950년대 도시지역 여성의 가정 내 결정권이 증대되어 여성의 지위가 상승한 결과 축첩문제에 대해 사회적으로 항의하는 수준으로까지 여성들의 일상적 권리의식이 성장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김원은 한국 산업화 시기 여성 노동자의 ‘일상’을 통해 박정희 체제에 맞서 투쟁한 ‘투사로서 여공’과 산업화라는 거대한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양으로 여공’이란 두 가지 지배적인 해석으로 자리매김 되어온 기존의 70년대 여성노동사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이 공장에 취업하면서 가족과 단절되고 가혹한 노동규율 아래 겪는 소외감과 낯섦의 자리를 작업장의 가족주의가 파고들기도 하고, 국가가 여공들을 ‘산업전사’·‘모범근로자’로 호명하며 일상을 장악하기도 했음을 분석한다.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에서 중요했던 것은 통상적 노동사에서 강조하는 ‘사건’이 아니라, 가족과의 단절, 새로운 노동경험, 국가와의 제도적 접촉이었다고 주장한다. 이희영은 체험된 폭력과 세대 간의 소통에서 구술생애사의 방법론을 통해 198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을 생생하게 재구성한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생애사 사례를 통해 그들 부모세대의 정치적 박해 경력이 복합적인 방식으로 구술자의 학생운동 참여에 영향을 끼쳤고 그들의 학생운동에는 부모세대 좌익정치의 온당한 복원의 의도도 담겨있었다고 분석한다. 이는 ‘분단체제’라고 이름 붙여진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개인의 생활세계 속에서 구체화되는 한 단면이기도 하였다.
에필로그에는 워크숍에 참여했던 피터 램버트의 글을 실었다. 램버트는 처음에 독일 일상사학자들과 한국 학자들의 면면을 보고 단순히 학문 수입의 장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직접 참여한 결과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면서, 독일에서 있었던 논쟁을 예로 들며 한국 학자들이 앞으로 학문적 절차를 강화하여 일상사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길 바라며, 이러한 교류의 의의를 피력하였다.
일상사란 무엇인가
1990년대 후반부터 생활사 연구라는 주제로 대중적 역사서적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기 시작했다. 이런 책들은 새로운 접근방법과 실험적 서술 등으로 역사 대중화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일상사(생활사)가 특정한 이론과 방법론을 가진 하나의 도전적 역사학이 아니라 기존의 구조적 역사서술 위에 ‘일상’을 덧붙이기만 하면 되는 가볍고 기술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사 연구는 시대가 규정하는 구조의 틀 속에서 사람들이 체제의 요구에 어떻게 적응하고, 저항하며, 무엇을 수용하고 거부하는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일상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행위들이 어떻게 체제와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며 구성하는지 살피는 작업이다. 이로써 사회구조와 지배의 성격을 새롭게 해명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대문자 역사에 대한 보충사로서의 일상사가 아니라 소문자 역사로써 대문자 역사를 해체하고 역사를 복수화하려는 시도이다. 이를 통해 일상사 연구자는 체제의 요구에 의해 단일한 정체성으로 재구성된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다중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행위를 역사화하고, 대문자 역사담론에 의해 짓눌리고 가려진 소수자의 존재를 가시화한다. 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