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전세계의 시선은 독일에서 벌어진 월드컵 개막식으로 모아졌다. 이날 독일월드컵 개막 선언을 한 사람은 호르스트 쾰러(Horst Köhler)로 현재 독일 연방 대통령이면서 지난 2000년부터 4년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역임한 인물이기도 하다.
쾰러 대통령은 이날 “페어플레이를 통해서 축구팬들이 하나로 뭉치게 되길 바란다”는 개막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이 대회에 참여한 여러 개발도상국이 이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였을까? 호르스트 쾰러는 불과 4년 전인 2002년 브라질에 304억 달러의 외채를 제공하면서 엄격한 긴축예산정책을 요구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당시 쾰러 IMF 총재는 이 돈을 빌려주면서 브라질 대통령 후보들에게 이 정책에 동의해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들 가운데는 현 브라질 대통령 룰라(Lula)도 끼어 있었다. 아마도 이 일을 기억하는 브라질 사람들은 거의 내정 간섭에 가까운 이러한 행위가 페어플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살펴본 김에 이번 독일월드컵 출전국들의 외채 관련 현황을 짚어보자. 출전국 32개국 중에는 심각한 외채 위기로 과중채무빈곤국에 속한 나라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은 앙골라, 코트디부아르, 가나, 토고로 해당국의 수출액에 비해 외채가 150%를 넘게 되면 국제통화기금이 개입하여 외채 경감 조치를 받게 된다. 반면 소위 채권국이라 할 수 있는 선진산업국들도 이번 월드컵에 다수 참여하고 있다. 개최국 독일을 비롯한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은 대표적인 채권국으로 이들은 국제통화기금(IMF) 투표권의 40.4%(2000년 기준)를 점유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한다. 세계에서 외채 규모가 가장 많은 나라들도 월드컵에 참여하고 있다. 브라질 아르헨띠나 멕시코 같은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이 여기에 속하며 한국의 외채 규모도 상위권에 속한다. 결국 축구 경기라는 점을 빼고 보면 이번 월드컵은 신용불량국가와 부자 나라와의 경합처럼 보인다. 하지만 누구 진짜 신용불량국인가,라는 점을 여러 모로 따져볼 때 상황은 180도로 역전된다. 『신용불량국가』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든 책이다.
반칙으로 시작된 외채
벨기에에 본부를 둔 제3세계 외채 탕감을 위한 위원회(CADTM)에서 활동하는 두 활동가 다미앵 미예와 에릭 뚜쌩은 이 책에서 ‘페어플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국제금융기구와 외채의 냉혹한 세계 지배를 고발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외채는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옐로 카드’ 감이었다. 지난 1970년대 서방 은행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달러로 가득 차게 된다. 우선 자국의 인플레를 우려한 미국이 해외 투자를 장려하면서 많은 달러가 서방 은행으로 몰려갔고, 오일 쇼크로 순식간에 엄청난 달러를 벌어들인 산유국들의 돈이 서방 은행에 예치되었다. 이때는 마침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진 상태여서 돈은 넘쳐나는데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돈이 외채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외채는 처음부터 선의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었다. 선진산업국은 남아도는 돈을 개발도상국에 빌려줌으로써 자국 상품의 판매를 꾀했고(연계 원조), 또한 맥너마러(MacNamara)가 이끈 세계은행은 미국의 반공․반민족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외채를 이용했다. 외채가 지정학적으로 이용된 사례는 무수히 많은데, 그 대표적 예가 자이레의 모부투 정권과 칠레와 아르헨띠나의 독재정권에 대한 지지였다. 이들 부패한 독재정권에게 외채는 개인의 치부를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모부투는 사망 당시 자이레 외채의 2/3에 해당하는 금액(80억 달러)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르헨띠나의 독재정권은 차관으로 빌린 돈을 은행에 넣어두고 그 이자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까지 했다.
외채 위기와 국제금융기관
이렇게 부도덕한 방법으로 쌓이기 시작한 외채는 70년대를 거치면서 무려 12배가 증가해 1980년에는 개발도상국의 외채 총액이 6천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 시점이 지난 1997년 한국을 패닉 상태로 몰아간 외환 위기의 시발점이다. 80년대에 들어 미국은 자국으로의 투자 유치를 꾀하기 위해 이자율을 급격히 올린다. 이 과정에서 외채에 대한 이자율이 동반 상승했고, 원자재 가격이 폭락하면서 개발도상국은 소득은 줄어드는데 더욱 많은 돈을 갚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급기야 1982년 멕시코가 부채 상환의 포기를 선언했고 아르헨띠나, 브라질이 그 뒤를 이었으며 이후 러시아, 동남아, 한국, 다시 라틴 아메리카 지역으로 외채 위기는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이렇듯 외채 위기가 닥칠 때 이를 도맡아 처리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같은 국제금융기관의 조치들이 개도국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구조조정정책이라 불리는 이들의 조치는 한마디로 서구의 금융기관과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다. 이들은 우선 해당국의 수출을 장려한다는 취지로 한두 가지의 원자재나 1차 산업을 육성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해당 품목의 가격 폭락에 대비하기 어렵게 하고 부가가치의 주요부분을 선진국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코트디부아르 같은 나라의 경우 싼값으로 카카오를 수출할 뿐 프랑스나 스위스처럼 초콜릿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구조조정은 시장의 완전 개방을 목표로 하여 안 그래도 열악한 개도국의 시장을 다국적 기업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며 공기업의 민영화 등을 통해 실업의 증가, 공공 써비스의 품질 저하를 가져온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국제금융기구가 추진하는 정책에 개발도상국은 얼마나 간여할 수 있는 것일까? 저자들은 개도국은 이들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이는 국제통화기금 이사의 투표권 분포만 봐도 명확히 알 수 있는데 미국은 투표권의 17.11%를 차지하는 반면 가봉이 주도하는 아프리카 23개국 그룹의 투표권은 1.16%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15% 이상의 투표권을 갖는 미국은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중요 사항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 실질적으로 이 기구를 조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