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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을 꿈꾸며
바바라 호지슨| 조혜진 역| 말글빛냄| 2006.06.28 | 304p | ISBN : 8992114036
19세기 서구 여성들이 갈망한 꿈, 동방으로의 여행은 여성들에게 또 다른 자유의 세상이었다. 온갖 제약을 물리치고 낯설고 험난한 동방으로 여행을 떠난 그녀들은 진정한 자유주의자이고 낭만주의자였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모험을 꿈꾼다. 하지만 모험을 위해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용감하게 낯선 곳을 향해 여행을 떠난 여성들이 있다. 그녀들은 남성 못지않은 정신과 체력으로 동방의 구석구석을 여행했다. 때로는 환대를 받았지만 어려움이 그보다 더 많은 것은 사실. 하지만 그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모험과 자유에 대한 동경으로 동방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현재의 세계에서 벗어나 과거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 숨을 쉬는 현재의 서구로부터, 과거가 살아있는 동방으로....!”
■ 왜 동방을 여행했는가?
동방과 자유를 연결시킨 최초의 여성은 1717년의 메리 워틀러 몽테규 부인일 것이다. 그녀는 서구 여성으로는 최초로 터키를 여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터키를 여행할 때, 유럽에서는 ‘아라비안 나이트’가 <천일야화>라는 제목의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었다. 그녀는 책으로만 보았던 ‘아라비안 나이트’를 터키에서 몸소 체험하면서 자신의 느낌 그대로 글로 남겼다. 감수성 뛰어났던 그녀의 글은 <천일야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동양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폈다. 그녀는 터키인의 복장을 상세히 묘사하면서, 터키인의 복장을 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놓았다. 이에 완전히 매료된 유럽 독자들은 집 안의 옷장에 터번, 판타롱 바지, 카프탄(터키인의 기다란 상의) 등을 가득 채워 넣기도 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여성들이 동방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홀로 떠난 사람도 있고, 남편과 함께 공식적인 업무 수행차 떠난 여성들도 있다. 그녀들은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이라크, 터키, 이란 등지를 여행했다.
그녀들은 왜 동방을 그리워했는가? 단지 모험을 위해 떠난 여성도 있고 자유를 찾아 떠난 사람도 있으며 단순한 호기심으로 동방을 여행한 사람도 있다. 또 현재의 삶이 지겨워 탈출구를 찾고자 여행을 떠난 사람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녀들의 동방 여행과 그녀들이 쓴 여행 후기, 그녀들이 그린 그림, 그녀들이 동방에 퍼뜨린 유럽의 사고와 풍습은 동서교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1717년부터 1930년(오스만 터키제국이 멸망한 후 10년)까지 오스만제국이었던 많은 나라들을 여행한 여성들을 살피고, 그들의 여행 방식, 의상, 여행의 동기, 태도,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을 면밀히 고찰한 책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자유를 발견하고, 세계 속에서 여성의 위치를 확립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들려준다.
■ 누가 여행을 떠났는가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에 서양에서는 많은 급속한 변화가 일어났다. 계몽운동, 사회적 격변과 혁명, 빅토리아 시대의 속박과 모순 등 20세기 초 급속한 변혁이 모든 분야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는 미약했고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러기에 동방으로의 여행은 여성들이 인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 수준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동방의 여성들을 만나면서 그녀들보다 자신들이 비교적 수준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들 중 일부는 오히려 동양이 서양보다 성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사벨 버튼은 “한 번 동양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여자는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모든 여성들이 탈출을 노린 것은 아니다. 19세기에는 아무래도 동방보다 유럽에서의 삶이 더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한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동방을 여행한 사람들은 좀더 새롭고, 좀더 자유로운 삶을 찾아 떠났다.
통계적으로 보자면 1717년부터 1930년까지 동방으로 여행을 떠난 여성은 대략 350명 정도 된다. 영국 여성이 240명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프랑스여성이 58명, 독일어권 여성은 28명, 그 외의 나라 여성들은 23명이었다. 미국 여성들도 동방여행을 많이 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성지순례를 목적으로 여행을 떠났다.
■ 그녀들의 이야기
거트루드 벨은 1905년에 예루살렘을 출발하여 여행객의 발길이 닿지 않던 다마스커스의 하우란을 둘러본 후 험난했던 여정에 관한 글을 남겼다. 그녀는 이 글을 통해 출발할 때 느꼈던감흥을 잘 전하고 있다. 그 후의 여행에서도 그녀는 동방에 매료되었고 바그다드에서는 9년 동안이나 머물렀다.
아멜리아 에드워즈는 이집트를 여행했는데 그녀는 카이로에서 만난 여성을 이렇게 묘사했다. “베일을 쓴 여성이 비둘기 떼가 모여 있는 옥상 위에 서 있었다. 그 광경보다 더 단순한 광경은 없었다. 아무것도 그보다 더 동양적이고, 낯설고, 신기루 같지는 않을 것이다.” 엘라 사이케스는 친오빠인 메이저 퍼시 사이케스와 함께 1895년부터 1896년까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를 여행하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배를 타고 이곳에 내린 그 순간부터 동양의 매력은 나를 사로잡았다.” 또한 올림페 오두아르Olympe Audouard는 달빛에 비춰진 카이로의 모습이야말로 아라비안 나이트의 한 장면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동방에 대한 인상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사람들은 이 밖에도 무수히 많았다. 콘스탄티노플에서 6개월 동안 머물렀던 줄리아 파르도는 동방의 실제 모습에 대해 “사랑이라는 안개는 정말로 걷혀버리고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특히 도시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대해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로지타 포브스는 많은 기행문을 남긴 작가로, 1921년에는 리비아의 알 쿠프라 오아시스를 원정한 내용을 담은 <사하라 사막의 비밀The secret of the Sahara>을 썼다. 그녀는 남성들만의 영역을 침범했을 뿐 아니라, 가장 경계하던 다른 한 곳을 선택한 여자였다.
또 1834년에는 새로운 여성들이 동방 여행의 대열에 합류했다. 하층 계급과 중산층 계급의 해방된 여성 일행이 마르세유에서부터 알렉산드리아까지 항해를 한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이집트에 있는 여성들을 선동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바로 생시몽주의자*들이었다.
*생시몽주의란 카운트 끌로드 앙리 드 루브르 생시몽Count Claude-Henri de Rouvroy에 의해 창시된 운동으로, 여성의 평등을 비롯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운동이었다. 1825년에 생시몽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철학은 페르 앙팡탱(바르텔미 프로스페르 앙팡탱)으로 이어졌다.
■ 어떻게 여행했는가
당시의 동방여행은 쉽지 않았다. 극단적인 기후, 음식, 언어, 이동 수단, 잠자는 곳, 목욕하는 곳, 잠시 쉬는 곳, 전염병(이질과 콜레라) 등등 모든 것이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이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루이자 젭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먹을 게 없어서 굶기도 하고, 이따금 비를 맞으며 잠을 잤다.”
◆ 이동 수단
중동지역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말이나 노새를 타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여성이 말을 능숙하게 타기란 쉽지 않았고 더구나 그때의 복장은 바지가 아니라 치마였다. 동방을 여행하는 여성들의 대부분은 긴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말을 타기가 여간 곤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용한 것이 동방의 특수한 ‘탈 것’ 이었다. 수크두프shuqdhuf, 카자웨kajaweh, 탁타라완takhtarawan 등이 그것이다. 이 것들은 일종의 ‘들것’으로 원래 하렘에 있는 여성들이 이동하는데 이용하기 위해 고안된 도구였다. 이 도구들은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말이나 노새를 사용할 수 없었을 때에는 유용했다. 여성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곳을 지날 때면 들것 속으로 여성을 숨기고 다닐 수도 있었다. 아프거나 피곤한 여행자들은 잠시 말에서 내려 이 들것을 타고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 잠자는 곳
당시 동방에는 호텔이 없었다. 동방은 서구 사람들을 맞을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았기에 여행자들의 잠자리는 아주 불편했다. 로지타 포브스는 자신의 책에서 “난 아무데서나 자거나 아예 맨바닥에 누워서 잤다”라고 썼다. 동방에 호텔이 세워지기 전에 여행객들은 시리아인, 터키인, 이집트인들이 살던 칸Khan이라는 큰집에서 잤다. 칸은 다른 말로 ‘푼두크funduq’(숙박소)라고 불렸으며, 칸의 마당 한 가운데에는 상인, 가축, 상품을 위한 장소가 있었다. 화장실은 원시적이라서 여행자들이 별도도 돈을 지불하기 전에는 남성과 여성이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이사벨라 버드가 이라크에 머물렀을 때 칸의 안마당에 텐트를 치고 잤는데, 거기에는 양이 목줄에 묶여 있어서 함께 잠을 잤다. 또 다른 페르시아에 있는 칸에서는 내부의 온도가 영하 27도였고, 방에 들어오는 눈을 쓸어내야 할 정도였다. 버드는 이라크의 바큐바Ba’qubah라는 도시에서 묵었을 때의 혹독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지붕 바로 아래 있는 창문에는 구멍이 나 있어서 볏짚으로 막아 놓았다. 바닥은 축축했고 화덕도 축축했다. 마구간 귀퉁이에는 오래된 듯 보이는 거미줄에 먼지가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 음식
잠자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문제가 음식 문제였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이 어려움도 잘 극복했다. 루이자 젭은 어느 날, 음식이 다 떨어져서 양파, 초콜릿, 보브릴(자양 음료), 쌀 밖에 없었을 때 이를 몽땅 냄비에 넣고 사람이 먹기 힘든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하렘이나 베두인족이 제공하는 식사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필래프찜(쌀에 고기, 양념을 섞어 만든 터키식 음식)을 손가락으로 떠먹는데 익숙해지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대책을 마련해 오라고 충고했다.
1840년에 시리아를 방문했던 프랜시스 에저톤Francis Egerton 부인의 필수식품 목록에는 “휴대용 수프, 선원들이 먹는 건빵, 파스타, 사고(야자뿌리에서 채취한 녹말의 종류), 칡, 영국산 치즈, 홍차”가 있었다. 머레이의 안내책자에는 닭장을 가져와서 달걀을 얻는 방법도 나와 있다. 이사벨라 버드는 바크티아리 지역을 지나면서 식량을 얻을 곳을 찾을 수 없어 매우 고생을 해야 했다. 이미 바그다드부터 테헤란까지 46일에 걸친 여행을 하면서 몸무게는 약 15kg이나 빠진 뒤였다. 그녀는 홍차, 통조림에 들어있는 저장육, 우유, 분말 수프, 사카린 등을 갖고 갔었지만 금방 바닥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어려움은 많았다. 언어의 불통, 동방의 남자들(물론 남자들이 그녀들에게 어떤 해악을 가하지는 않았다)의 대한 공포심, 전염병도 그녀들을 괴롭혔다. 당연히 동방에서 죽은 여성들도 있었다. 1864년 카이로를 여행하던 알렉신 틴네의 어머니 해리엇, 그녀의 이모 아드리안나 빈 카펠렌, 하녀인 플로라는 병에 들어 죽었으며 알렉신은 온갖 고난을 헤치며 혼자 여행을 해야 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외교관이던 알퐁스 드 라마르탱Alphonse de Lamartine과 그의 영국 출신 부인인 마리안느 엘리자 버치Marianne-Elisa Birch는 1832년부터 1833년까지 시리아를 여행했다. 다마스커스 사람들은 여전히 외국인들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부부는 다마스커스에 몰래 들어가야 했는데 이 여행 도중에 그들의 어린 딸인 줄리아가 숨을 거두었다.
◆ 복장
동방을 여행하는 여성들의 또 다른 걸림돌은 복장이었다. 여행을 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들의 여행복은 실용성보다는 유럽인의 품위와 모양새에 치중하여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다른 대안을 생각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물론 몇몇 여성들은 특별한 복장을 입기를 희망했는데 즉각 비판을 받았다.
아멜리아 에드워즈Amelia Edwards는 자신과 친구인 루시Lucy를 이렇게 묘사하며 조롱했다. “끔찍한 종려나무 잎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녹색 베일을 하고, 하얀 우산을 들고 있는, 참으로 불편한 복장을 했다.” 패션 감각이 뛰어난 여성들은 그 지역의 의복이나 유럽식 남성복을 입기도 하고 변형시켜서 입었다. 이들 여성들이 깨달은 것은 편안한 옷을 입으면 자세가 달라지며 이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동양을 여행하던 서구 여성들은 남장을 했을 때 더 편안하고 안전함을 느꼈다. 하지만 계속 입을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서는 갈팡질팡했다. 여성들은 오랫동안 다리 노출은 점잖지 못하다는 말을 들어왔고, 남성 성의 상징을 빼앗는다는 비난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동양에 있으면서 의복에 단순한 변화만 줬을 뿐인데도 자신만의 세상이 열린다는 걸깨달을 수 있었다.
■ 동방의 색다른 모습
서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하렘의 원조격이던 건물은 콘스탄티노플의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의 대궁전Grand Seraglio이었다. 이 건물은 1541년에 술탄 슐레이만 대제Sultan Suleyman the Magnificent가 축조한 것으로 매우 유명한 건물이다. 하렘은 체르케스인Circassian이자 슐레이만 대제의 애첩이며, 서구에서는 록셀라나Roxelana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황후 후렘 술탄Hurrem Sultan이 만들었다.
‘ 하렘’이라는 말은 아랍어 ‘하람haram’에서 파생되었다. 하람이란 보호, 금단, 신성한 곳을 뜻하며, 우리가 하렘이라고 할 때는 그곳에 있는 여성들을 가리키거나 격리된 그 장소를 말한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아내를 부양할 만큼 부유한 남자라면 아내를 4명까지 둘 수 있다. 이슬람 국가의 여성들이 누리는 자유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귀족 가문과 결혼한 여성들은 거의 감금된 수준으로 생활을 해야 했으며, 하층민과 결혼하여 시골에서 사는 여성들은 반대로 자유를 누리는 등 자유의 수준은 다양했다.
서구 여성들이 하렘에 대하여 어떤 편견이나 선입관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기 어렵다. 또한 동양 여성들이 하렘을 방문한 서구인들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했었는 지는 더욱 알기 어렵다.
당시 동방을 여행한 여성들은 하렘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능한 한 이곳을 방문하려 했다. 또 예외없이 하렘에 대한 글을 남겼다. 하렘에 대한 글은 대개가 몽테규 부인과 같은 상류층 계급의 여성들이 쓴 것이었다. 이런 상류층 계급의 여성들에게는 하렘의 모습이 새삼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고급의 하렘과 목욕에 대해 끊임없이 묘사했다. 그녀는 하렘이 유럽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사치덩어리가 아니라 오히려 여성들을 위한 세계로서 완벽하고 안전하며, 남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하렘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이 책에 삽화로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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